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노스 5세 (문단 편집) === 즉위, 찬탈, 복위 === 718년 7월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 한창이던 때 [[레온 3세]]와 [[마리아(8세기)|마리아]] 황후 사이에서 출생했다. 720년 부황과 공동 황제가 되었으며, 741년에 레온 3세가 세상을 떠남에 따라 계승하여 즉위했다. 이는 685년 [[콘스탄티노스 4세]]에서 [[유스티니아노스 2세]]로의 왕조 내 세습 이후 거의 60년만에 이루어진 세습이다.(둘 다 부자세습) 하지만 세습은 절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즉위하자마자 아르메니콘 테마의 사령관이자 본인의 매부였던 [[아르타바스도스]]에게 당시 3차 피트나로 어지럽던 우마이야를 공격하여 고토를 수복할 것을 명령하였다. 국경을 향하던 그는 수도로 회군하여 황위를 찬탈하였다. 콘스탄티노스는 부친 레오 3세와 마찬가지로 성상 파괴론자였으나 아르타바스도스는 성상 옹호론자였다. 아르타바스토스는 방패 위에 아나스타시오스 총대주교와 함께 올라 그로부터 대관을 받았다. 콘스탄티누스의 성상 파괴 진영은 아나톨리콘 테마와 트라케시안 테마로 구성되었고 아르타바스도스의 성상 옹호 진영은 아르테미콘 테마와 옵시키온 테마가 중심이었다. 743년 11월, 두 세력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에서 맞부딪쳤고, 콘스탄티노스 군이 이겼다. 바로 끝난 것은 아니었고 [[외환의 죄|아르타바스도스가 우마이야 왕조에 도움을 요청했던 등]] 다소의 전개과정이 있었지만, 결국 콘스탄티노스가 승리하여 복위하게 되었다.[* 일단 쫓겨났다가도 다시 복위에 성공했으며, 반란자가 피가 직접 섞인 친척은 아니고 인척인 점은(처남-매부) 전대의 [[제노(로마)|제노]]-[[바실리스쿠스]]의 관계(조카사위-처외삼촌)와 유사하다.] 아르타바스도스와 두 아들 니키타스, [[니키포로스(아르타바스도스의 아들)|니키포로스]]는 원형경기장에서 공개적으로 실명되었고, 그에게 대관을 해주었던 아나스타시오스 총대주교는 곤장을 맞은 후 벌거벗은 채로 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경기장을 한바퀴 도는 수모를 받았다. 종전 서술에는 실명형을 당하지는 않았다고 되어 있었고, 영어 위키백과에는 채찍질 및 실명형을 당했다고(whipped and blinded) 되어 있는데, 754년까지 11년간 더 살았던 것으로 보아 전자 쪽이 더 타당하다고 보인다.[* 마취, 소독 등이 없었거나 초보적이던 전근대에 실명형을 당하면 세균감염 등 위생 문제로 대다수가 그리 오래 못 가서 죽었기 때문이다.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라는 예외가 존재하지만. 영어 위키백과의 [[https://en.wikipedia.org/wiki/Nikephoros_Bryennios_the_Elder| 大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문서에 따르면 그는 1078년에 실명형을 당하고도 최소한 1094/5년까지는 살아 있었다고 한다.] 총대주교 직첩도 잠깐 회수되었다가 아르타바스도스 시절에 성상 옹호론으로 돌아섰던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자 콘스탄티노스는 그를 용서해주고 총대주교에 바로 복직시켰는데, 이는 총대주교의 힘을 누르고 황권을 드높이려는 콘스탄티노스 5세의 속셈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